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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규 장군의 장렬한 전사 양규 장군에 대해서 알아보자

by hbtread 2024. 1. 9.

안녕하세요 읽으면 도움이 되는 블로그입니다.

고려거란전쟁 드라마에서 지승현 배우가 열연한 양규 장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어떤 누리꾼은 드라마에서 '양규 장군이 전사할 때 제사상을 차려 놓을 거다'라는 글도 올라왔습니다.

지난 방송에서 양규장 군이 애전 벌판에서 거란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모습이 전파를 탔습니다.

양규장 군과의 이별이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났다는 시청자부터 '이순신 장군 앞에만 붙었던 '성웅'이란 칭호를 양규에게도 충분히 붙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추모의 글도 올라왔습니다.

고려거란전쟁-양규-전사장면
고려거란전쟁 드라마에서 양규장군의 죽음

그럼 양규 장군의 역사적 사실 으 살펴보겠습니다.

양규

고려의 장군으로 거란의 제2차 침략(1010~1011) 때 흥화진을 지켜내고 곽주·무로대·이수·석령·여리참 등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여 많은 포로를 구출하고 고려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출신과 생년이 역사서에 보이지 않으며, 1010년(현종 1)부터 그 행적이 확인된다고 합니다.

양규는 목종(穆宗)을 섬겼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형부낭 중(刑部郎中)의 관직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형부‘낭중’을 역임하였다는 점, 당시 고려에는 무신을 선발하는 무과(武科)가 시행되지 않았다는 점, 고려 전기까지 군 지휘관은 대부분 문신(文臣)이었다는 점에서 본래 양규는 문신이었음이 유추됩니다.

이는 강감찬, 윤관 등이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었으면서도 군사 방면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것과 궤를 같이 합니다. 양규는 문신 출신 장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규의 활약

1010년 11월 거란의 황제 성종(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가 목종을 시해한 강조(康兆)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고려를 직접 공격하여 거란의 제2차 침략이 발발하였습니다. 

11월 10일(이하 음력) 거란군은 압록강을 건넜고, 16일 흥화진(興化鎭, 평안북도 피현군)을 포위하였습니다. 양규는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가 되어 정성(鄭成), 이수화(李守和), 장호(張顥)와 함께 흥화진을 사수하였습니다.

성종은 통주(通州, 평안북도 선천군) 밖의 백성을 사로잡아 그들을 흥화진에 보내 ‘목종은 거란의 번신(藩臣)이었는데 강조에 의해 시해되었으니 강조를 잡아 보낸다면 회군하겠다’며 항복을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흥화진을 지키던 장수들은 항복 권유에 응하지 않았고, 거란의 성종이 은그릇, 비단옷 등을 보내며 다시 귀순을 재촉하였으나, 이번에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22일 거란의 성종은 이들이 항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닫고 병력을 둘로 나누어 하나는 무로대(無老代, 평안북도 의주군)에 주둔시키고, 다른 하나는 통주로 이동시켰습니다. 통주에서 강조를 제압한 성종은 항복을 권하는 편지를 강조의 명의로 위조하여 양규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양규는 ‘나는 왕명을 받고 온 것이지 강조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며 따르지 않았습니다.

 

1010년 12월 6일 거란은 곽주(郭州, 평안북도 곽산군)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6,000여 명의 군사를 주둔시켰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양규는 16일 흥화진에서 군사 700명을 이끌고 통주로 이동하여 패잔병을 1,000명을 수습하였습니다. 그리고 17일 밤을 타 곽주로 이동하여 그곳을 지키던 거란군을 급습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남녀 7,000여 명을 구출하여 통주로 옮겼습니다.

 

1010년 12월 28일 현종(顯宗)은 강감찬의 권유에 따라 남쪽으로 피난하였고, 1011년(현종 2년) 1월 1일 거란의 성종이 개경에 입성하여 태묘(大廟), 궁궐, 민가를 모두 불태우고 11일에 철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양규는 18일 군대를 이끌고 무로대를 지키던 거란군을 습격하여 2,000여 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남녀 3,000여 명을 되찾았습니다.

다음날인 19일 이수(梨樹)에서 거란군과 충돌하여 석령(石嶺)까지 추격하여 2,500여 명을 죽이고 포로 1,000여 명을 구출하였습니다.

22일 여리참(余里站)에서 거란군과 싸워 1,000여 명을 베고 포로 1,000여 명을 되찾았는데, 이 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고 합니다.

28일 애전(艾田)에서 거란군 선봉대를 급습하여 1,000여 명을 죽였습니다. 곧 거란의 성종이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양규는 귀주(龜州) 별장(別將) 김숙흥(金叔興)과 종일 싸웠으나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져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이러한 양규의 분전에 힘입어 29일 흥화진에 주둔하였던 정성의 고려군은 압록강을 건너 돌아가는 거란군을 공격하여 크게 승리하고 잃었던 성을 모두 수복하였습니다.

양규의 사후

양규의 활약이 거란의 2차 침략에 고려가 승리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1011년 2월 현종은 양규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추증하였고, 4월에는 양규의 아내 은율군군(殷栗郡君) 홍 씨(洪氏)에게 평생토록 곡식 100 섬을 내리고 아들 양대 춘(楊帶春)을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하였다고 합니다.

아울러 현종은 직접 교서(敎書)를 써 홍 씨에게 내리며 양규의 능력을 칭찬하고 그의 활약으로 여러 성(城)과 진(鎭)이 보전되었다고 하였습니다.

1019년(현종 10) 현종은 양규에게 공신녹권(功臣錄券)을, 1024년(현종 15)에는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고려 태조(太祖)가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삼한공신(三韓功臣)이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삼한공신 중에서도 신흥사(新興寺)의 공신당(功臣堂)에 초상화가 걸린 자들을 특별히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라 하였습니다.

삼한후벽상공신은 삼한벽상공신에서 후(後)가 추가되었으니 후삼국 통일 이후 고려에 최고의 공을 세웠다는 뜻인 것입니다. 고려의 10대 왕인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은 양규의 공을 기려 공신각(功臣閣)에 그의 초상화를 걸어두게 하였습니다.

 

아들 양대춘은 이후 그 관직이 안북대도호부부사(安北大都護府副使)를 거쳐 직문하성(直門下省) 위위경(衛尉卿)에 이르렀습니다. 예종(睿宗, 재위 1105∼1122) 시기에는 양규의 증손 신기직장(神騎直長) 양제보(楊齊寶)에게 은합(銀榼)을 내렸습니다. 이처럼 양규의 전공은 그 후대에 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양규는 명장으로 인식되었는데, 세조(世祖, 재위 1455~1468) 시기 양규 등 18명을 배향하는 무묘(武廟)의 건립이 논의된 점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글을 마치며

거란의 2차 침략에 고려가 승리할 수 있는 수많은 전공을 세운 양규 장군 

고려는 이 양규장 군을 개국 공신과 동급으로 올리며 양규 장군의 증손자까지 상을 내렸습니다.

공신을 공신 대접 하는 나라 무과가 아닌 문(文) 신 이었지만 맡은봐 소임을 다했던 양규 장군은 우리가 당연히 알았어야 할 위인이었습니다. 이번 고려거란전쟁 드라마에서 부각이 되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건 위인들이 존경을 받아야 똑바른 나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일가족이 희생되고 멀리 다른 나라에서 돌아가신 홍범도 장군의 예우를 똑바로 하지 않는다면 나라다운 나라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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