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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중국의 전 총리 리커창이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입니다.
리커창 전 총리는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리커창
리커창은 1955년 7월 안후이성 허페이시 태생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입니다. 제7대 국무원 총리를 했습니다.
2012년 제18차 중국공산당 당대회에서 원자바오의 뒤를 이어 중국 국무원 총리로 지명된 사람이었습니다. 태자당인 시진핑과 달리 후진타오가 있던 공산주의 청년단(공청단) 출신이며, 베이징대를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배경으로 두는 인물이었습니다.
원래 후진타오의 후임으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이 사람이 될 수 있었지만, 장쩌민의 상하이방의 격렬한 반대에 밀려 결국 태자당의 시진핑이 국가주석이 되고 이 사람은 총리가 되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산당 서열 2위로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2013년 3월 15일 중화인민공화국 양회에서 정식으로 국무원 총리가 되었으며, 10년 임기를 보내고 2023년 3월 11일 후임자 리창이 선출되며 총리직에서 퇴임하였습니다. 정계를 떠난 지 7개월이 지난 2023년 10월 27일, 상하이에서 심장마비로 인해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리커창의 생애
리커창은 베이징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이공계 출신이 주름잡던 다른 총리들과는 달리 법, 경제학과 출신입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리커창이 77학번으로, 문화 대혁명으로 오랫동안 대학입시가 중단된 이후 치러진 입시를 통해 입학한 첫 세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학번은 이후 중국을 이끌어나갈 선두주자로 주목을 받았는데, 리커창은 그중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재학 중에 학생회장을 맡고, 82년 베이징대학 공청단 서기를 역임하게 됩니다.
이어 83년에는 공청단 서기국에 들어가고 92년에는 공청단 제1서기로 등극하며 만 37세에 장관급 인사가 됩니다. 이런 고속승진의 배경에는 공청단 대선배로서, 덩샤오핑에 의해 중국의 차기 지도자로 지명받은 후진타오의 후원이 있었습니다. 관리 생활 중에도 학업을 병행하여 1995년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했습니다.
이 논문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경제학 관련 상인 쑨예 팡(孙冶方) 상을 받았다. 이때부터 중국공산당의 정치인으로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1998년 1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에 입성하고, 1999년 허난 성 성장에 지명되었는데,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44세로 최연소 성장을 역임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의 동부 지역 급격한 경제 성장 과정에서 중부 내륙 지방인 허난 성의 경제를 이끈 공을 인정받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면서 인상적인 업적을 남겼던 왕치산이나 왕양에 비해 지방정부 책임자로서의 실적은 다소 애매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공청단 제1서기 출신으로 후진타오의 든든한 후원을 받고 있었으며, 최연소 지방 지도자라는 타이틀 덕에 이 시점에서 리커창은 차기 지도부 입성은 당연히 확정된 상황이었고, 심지어 외부 관찰자들이 보기에는 후진타오의 국가주석과 총서기 자리를 이어받을 유력 후보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떨어졌으나 2007년 상하이 서기로 깜짝 발탁된 시진핑이 막판 뒤집기에 성공하며 기류가 달라지게 됩니다. 같은 해 당대회에서 시진핑이 서열 6위의 국가부주석과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맡고, 리커창은 서열 7위의 국무원 상무부총리를 맡아 후계구도에서 시진핑의 우위가 확정되게 됩니다.
결국 2010년 시진핑이 중앙군사위 부주석으로 지명되면서 후계자 경쟁은 종료되었고, 서열 차이를 뒤집지 못하고 2013년 최종적으로 국무원 총리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일부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을 대신하여 타국 정상인사와 자리를 갖는 인물이었습니다.
시진핑과 불화설
2020년 6월, 시진핑과 리커창 간의 갈등설이 불거졌습니다.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전체 회의 폐막 후 가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라커창 총리가 중국인 6억 명의 월 수입이 17만 원에 불과하며 집세를 내기조차 힘들다고 토로한 것입니다. 중국은 지금까지 중국 경제 성장성만 전면에 내세웠는데 중국인의 거의 절반 가량이 빈곤층임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코로나19로 이 상황이 더 심각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리커창 총리는 노점상 경제를 언급했는데 중국 청두시에서 노점상으로 10만 명의 일자리를 해결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임시로 노점상을 합법화해 영업시간과 지점, 영업 방식을 지정해 단기간으로 빈민층에게 일자리를 줄 수 있는 방법으로 노점상 경제를 제시한 것입니다. 이후 중국 여러 도시에서 노점상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바로 베이징시 도시관리국에서 노점상의 불법 행위에 대해 철저하게 단속하겠다고 밝힌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진핑과 리커창의 갈등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진핑은 당이 통제하는 경제를 리커창은 자유 경제를 강조해 왔다고 합니다.
글을 마치며
중국은 리커창 총리의 사망으로 국가가 애도 기간으로 들어갔습니다. 리커창 총리는 지난 2007년에도 중국의 국내총생산 (GDP)등 경제지표를 믿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미국 국무부 외교전문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2012년에 중국 총리에 올라서 시진핑이 무시하고 있는 '10년 이상 재임 제한 원칙'을 지키려고 2022년 퇴임한 총리입니다. 시진핑과 갈등설이 불거지면서 임기 막판에는 존재감 없는 총리였습니다.
정부 부처를 돌면서 고별인사를 하는 리커창을 촬영한 영상은 소셜미디어에서 검열 삭제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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